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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득용 시인, 문경문학관 관장 |
| 반제이 도랑
엄영란 1 여그가 말이여 아낙네들 빨래터 였지라 도랑이 미터지도록 물이 콸콸 흘렀지라 시엄니 시아부지 무명옷에다 내 새끼들 똥 빨래를 모도 한 방티씩 이고 나와 지 가슴 치듯 방망이질을 해대지라 요새 같이 술술 때가 빠지는 비누가 있길허나 고무장갑이 있길허나 딩기가루에 양잿물 잔뜩 너어 살얼음 끼는 도랑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치대고 나믄 손등이 툭툭 터져 옴두꺼비 같이 되는기라 이 손 저 손 호호 붐시러 밑도 끝도 없는 야그들을 듣든지 말든지 하나거치 주절주절 대는기라 웃다가 훌쩍대다가 이집 저집에서 흘러나온 응어리 같은 것들이 한테 엉키서 둥둥 떠니리 가믄 한숨도 따라가고 웃음도 따라가고 아낙네들 아침나절이 그러키 흘러갔지라 어지가 그날이고 오늘이 그날이고 이날저날이 다 그날 가튼께 아낙네들 하루하루도 그리 흘러갔지라 그래도 그때는 여그가 이 골의 젖줄이였는기라!
2 노파의 손등에 주름이 깊다
3 족대로 없는 고기를 낚는 벽화가 파랗다 돌덩이를 들고 있는 사내 앞에 계절을 모르는 튤립이 꼬장꼬장하다 언덕을 기어오르는 잔디들이 얼키고 설키며 한 마디씩 자리를 메꿔간다 징검다리 사이로 도도하지 않은 도랑물이 쉼 없이 흐른다
만개하려는 벚꽃들이 비누거품처럼 부글거린다
요즘 MZ세대들의 빨래터는 빨래방이다. 코인빨래방의 익숙한 동전소리가 빨래문화의 좌표가 되고 지금은 예전과는 달리 개울이나 강에서 빨래를 하는 것은 실정법 위반이다. 반제이 도랑은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물리친 반전(反轉)에서 유래된 모전천의 옛 지명으로 현재는 생태하천(Ecological Waters)으로 복원되어 수달과 청둥오리가 서식하는 벚꽃의 명소가 되었다. 시인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반제이 빨래터 풍경을 걸쭉한 문경 탯말로 소환한다. 탯말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배운 말로 이 시의 시작(詩作) 모티브가 되고 있다.
하여 동아줄 같은 남존여비와 효도지상의 윤리에 갇혀 갑질당하는 우리들 어머니 이야기를 방백(傍白)으로 내레이션 한다. “여그가 말이여 아낙네들 빨래터였지라” 그 시절은 보통 삼대가 한집에 살다보니 허구한 날 빨래거리가 넘쳐나고 봄이 채 오기도 전 겨울 내내 밀렸던 이불빨래며 솜바지 저고리 식구들 옷가지를 “지 가슴 치듯 방망이질을 해대”며 살얼음 낀 도랑물에 헹구다 보면 “손등이 툭툭 터져 옴두꺼비 같이 되는기라” 그 당시는 제대로 된 비누가 없어 집집마다 “딩기가루에 양잿물 잔뜩 너은” 수제 비누를 만들어 썼다. “밑도 끝도 없는 야그들을 듣든지 말든지 하나거치 주절주절 대”면 웃다가 울다가 “한숨도 따라가고 웃음도 따라가”는 반제이 빨래터는 “오늘이 그날이고 이날저날이 다 그날” 같지만 여인네들의 온갖 수다와 소문이 자자한 시골마을 공동체의 풍속화가 아니었던가.
“노파의 손등에 주름이 깊다”는 둘째 연은 독자로 하여금 마음과 가슴이 먹먹해지는 관용적 생략(ellipsis)으로 의도된 화자 자신이다. 과거시제의 설정을 현재로 이동시킨 시인의 한평생이 감언(甘言)이 되고 흐르는 것은 세월이고 시간이다. 종속의 개념에 물이 있다. 빨래터였던 도랑물이 벽화를 그린다. “계절을 모르는 튤립이 꼬장꼬장”하고 “잔디들이 얼키고 설키”는 것은 그래도 “도도하지 않은 도랑물이 쉼없이 흐”르기 때문이리라. 반제이 도랑은 화자의 이미지즘(Imagism) 감성의 절제와 언어감각이 뛰어나 “비누거품처럼 부글”거리며 벚꽃으로 개화하는 무형의 봄날이다.
------ 엄영란 시인, 경북 문경 출생 2012년 <문학청춘> 등단, 시집 『장미와 고양이』(2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