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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득용 시인, 문경문학관 관장
주암정에서 나를 듣다
정상미
그대, 오늘도 흔들리며 가고 있나요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 작은 배 안에 있었고 처음 지상에 떨어질 때 이미 다른 배를 타기 시작했지요
미세하게 때로 세차게 너울대는 파도 그것이 온몸을 긋고 갈 때마다 그대와 나는 단단해졌어요
흔들리지 않고 가라앉지도 않는 배를 보신 적 있나요 그것도 바위로 된 배를요 배 위엔 사색에 빠진 정자가 언제나 차 한 잔을 준비해 놓아요 지금껏 보지 못한 옛사람의 향취가 밴 아늑 문경의 산북에 가면 신선처럼 고요해질 수 있어요
고요하면 들리는 나 고요하면 보이는 한 사람
열심히 파고를 헤쳐온 그대, 잠시 쉬어가세요 처마를 타고 능소화 처녀들 지친 마음 어루만지고 온화한 연꽃 방석들 한껏 귀 열어 그대 얘기 들어주지요 옆구리를 스치는 금천의 물소리에 복잡한 실타래 술술 풀려요 새소리 바람의 말, 혼자서도 스미고 둘이라도 번져요
주암정에서 나를 써 내려갈 때 사람에게서 솟아난 모서리는 순해지고 가슴에서 다시 종소리가 피어나요 뎅그렁, 소리 속으로 그대 들어 오세요
‘정자 앞의 부벽은 천년이나 되었고 대숲을 바라보니 푸름이 몇 겹인가’ 채헌(1715~1795)이 지은 석문구곡(石門九曲)에 나오는 주암정(舟巖亭)의 가사이다. 주암정은 1511년 국내 최초의 한글소설인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저술한 채수(蔡壽, 1449~1515)의 6세손인 유학자 채익하(蔡翊夏, 1633~1675)를 기리고자 1944년 후손들에 의해 지어진 정자이다. 정자 기둥에는 ‘주인이 없어도 차 한 잔 드시고 가세요’라는 글귀와 함께 믹스커피가 늘 준비되어 있다. 현재는 10세 종손인 채훈식이 연꽃과 능소화를 심어 금천(錦川)의 수류화개(水流花開)로 운치를 더하는 문경의 명소이다.
시인은 아직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 배(腹) 속에 있던 생명의 존재인 우리를 주암정 연못 안에서 뱃머리를 치켜세우며 마치 출향하는 듯한 배(舟)바위와 동격화하는 은유의 긴축미를 구사하고 있다. “그대”로 시작되는 이 시의 내밀함이 “우리”로 치환되면서 “배 위엔 사색에 빠진 정자” 주암정에서 차 한 잔을 놓고 “고요하면 들리는 나/ 고요하면 보이는 한 사람”을 선문답한다. 원래 고요의 때(時)는 앞뒤를 구별하지 않으며 여여하여 움직임이 없는 일체만법이 아니겠는가.
그 와중에 능소화는 걸림이 없는 그리움으로 피어난다. 그뿐이랴. 속세에 물들지 않는 꽃으로 예부터 선비들에게 사랑받던 연꽃들이 “한껏 귀 열어 그대 얘기 들어주”면 금천의 물소리 근품산 새소리 바람의 말까지도 돌 위에 새기는 주암정이다. 자귀나무 꽃과 참나리는 계절의 덤으로 시인은 다시 자신을 써내려간다. “사람에게서 솟아난 모서리는 순해”지면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종소리가 귀보다 우리들의 마음을 먼저 울린다. 하여 그 종소리 얼마나 커다란 울음 해야 세상의 번뇌를 떨칠 수 있을까.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비언어적인 문학의 소통을 꿈꾸는 시인의 종소리는 그저 적요를 깨우는 푸른 종소리로 “뎅그랑” 싱그럽다.
------ 정상미 시인 경북 문경 출생.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2021) 《대구문학》 시 당선(2013) 서울문화재단 문학창작지원금 수혜(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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